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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과

한국사학, 동양사학, 서양사학에 대한 균형잡힌 역사인식을 고취하고 폭 넓은 역사학적 안목을 가진 인재를 양성합니다.

1952~1960

학과 창설기(1952~1960)

1951년 문교부 당국에서는 본교 창설에 관련한 일체의 절차를 갖추어 1951년 10월 6일자로 대통령의 인가를 받았는데, 문리과대학 7개학과(국문, 영문, 사학, 철학, 수학, 물리학, 화학), 법정대학 3개학과, 사범대학 10개학과, 의과대학 2개학과, 농과대학 3개학과 등으로 「국립경북대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인가 당시 사학과는 정원 80명에 입학정원 20명으로 출발을 하게 되었다.
이후 1952년 4월 25일자 문교 제473호 문교부장관 훈령에 의거하여 구)대구대학의 문리과대학 학생 대다수를 해당학과 학년에 편입시킴으로써 정식으로 본과의 출발이 시작되었다. 초기 정원 80명으로 출발한 사학과는 1954년에서 56년 사이에 정원 100명(입학정원 25명)으로 늘었으니 57년부터 60년대 초까지는 다시 정원60명(입학정원 15명)으로 감축되는 변화를 겪었다.

1952년 4월 개강과 동시에 동양사 개설을 김익호 교수, 서양사 개설을 노명식 교수가 담당하여 사학과의 강의가 시작되었으나 사실은 두 분 모두 처음에는 강사의 자격이었다. 그러나 곧 전임이 되면서 사학과의 기틀은 점차 잡혀갔다.
그 해 10월 1일 김익호 교수(일본 立教大學 졸)가 전임교수로 발령되어 사학과장직을 맡고 양사 개설을 비롯한 동양 시대사 전반을 담당하면서 가끔 동양사 특강, 세계문화사도 맡았다.

40대 중반의 원숙하고도 성실한 김익호 교수는 한 시간의 휴강도 허용치 않는 강의(당시는 휴강이 많았음)로서 전 경북대 내에 널리 알려졌다. 한변 김익호 교수는 1954년 9월부터 약 3년간 초창기의 대학원 학감으로서 대학원 전반의 사무와 아울러 대학원 사학과의 기초를 닦았으며, 이어 1957년부터는 경북대 학보사 부사장(지금의 주간)의 보직을 맡아 분주한 활동을 하였다.
이러한 보직에도 불구하고 강의의 열성에 대한 열성은 여전하였고, 「浮石寺의 史的 考察」(1956)이란 논문을 발표하였다.

1년 남짓 뒤에 전입강사롤 발령된 노명식 교수(서울대 졸)는 서양사 강좌를 담당하였다. 부족한 교원으로 인하여 동양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혼자서 서양 전시대사의 강의를 맡았다. 그러나 서양최근세사와 대사 강의에 특히 주력하였으며, 연습과 강독은 학생들의 원서해독 능력을 향상시키는데 중점을 두었다. 이 원서강독의 철저함은 후일 한문 사적 강독과 아울러 사학과의 학생은 누구나 다 영어와 한문을 마스터하고 졸업한다는 전통을 남겼다. 노명식 교수는 또 유명한 Toynbee의 「역사의 연구」(1954)를 번역하여 문화사 교재로 사용하였다.
이 책은 2차 대전 후 전 세계적으로 일어났던 토인비 붐을 1950년대 초에 우리나라에서도 일어켜 독자들에게 토인비의 문명사과에 대한 갈증을 풀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노명식 교수는 「토인비의 역사관에 대한 논쟁소고」(1958)란 논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1959~61년에는 하바드 燕京學社의 비지팅 스콜라로 渡美하였다가 귀국 후에는 유학중 관심을 기울였던 프랑스 최근세사의 연구로 방향을 바꾸어 갔다. 사학과 창설과 동시에 지역 특성상 비중이 높아 갈망해 마지않던 것은 한국사의 전임교수였으나 교수 난으로 그렇게 쉽사리 해결되지 못하였다. 부득이 강사로써 충당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것도 당시 사정으로 여의치 않았다. 그리고 사범대학의 한상준 교수가 강의의 일부를 맡아 주었고, 나머지 강의는 유석우 강사가 담당하였다.
한학자요, 독학의 국학자인 유석우 선생은 한국근세사, 조선 당쟁사, 중용강독 등을 담당하였다.

1955년 3월 마침내 한국사 전임으로서 박영구 전강(서울대 졸)이 부임하여 오랜 숙원은 이루어졌다. 박영규 교수는 한국최근세사와 국사연습을 담당하면서 연구 관심은 주로 천주교 전래 이후의 조선 후기에 두었으며, 1960년에는 「新稿國史」를 저술하여 교재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1956년 김성복(서울대 졸)교수와 김엽 교수가 강사로 채용되어 부족한 교수난을 임시로 해결해 나가다가, 1958년에 둘 다 조교로 발령받았고, 1960년에는 전강으로 승진되었다. 김성복 교수는 주로 미국사를 전공하였으며 「W.윌슨과 미국참전의 동인」(1957)을 발표하고 「연방주의론」(1960)을 번역하더니, 1960년 7월 "스미스 먼드"케이스로 渡美 유학하였다. 김엽교수는 중국 고대사를 전공하여 유관 강의를 담당하였으며, 「중국고대노예고」(1958), 「고대 중국노예제의 특수성과 그 종말」(1959)등의 논문을 잇달아 발표하였다.

그리고 학과 창설 초기 교수의 부족으로 인한 강의 공백은 이해남(서양사), 차일평(서양사), 안기승(서양사), 김충섭(서양사)등 강사들이 담당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초창기의 사학과는 교수의 보족에다 연구실과 자료 부족 등이 겹쳐 전공분야의 학술활동이 대체로 부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졸업한 다수의 돔누들은 학계를 비롯하여 여러방면에서 진출하여 활약하였다.
즉, 김엽(1회, 본과 교수, 안동대 학장, 세명대 총장 역임), 오주환(1회 본과 교수역임), 송태소(2회, 본과 교수역임), 고석림(3회, 본과 교수역임), 문경현(4회, 본과 교수역임), 박송학(6회, 경상대 교수역임)교수와 이례적으로 사학과 재학생으로서 고등고시에 합격하였던 김운태 고검검사(1회)와 황해결(2회, 제 7회 행정고시)씨도 이 시기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