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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과

한국사학, 동양사학, 서양사학에 대한 균형잡힌 역사인식을 고취하고 폭 넓은 역사학적 안목을 가진 인재를 양성합니다.

1961~1970

학과 성장기(1961~1970)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 이후 17일 군사혁명위원회가 정권을 인수하면서 21일 문교부장관에 문희석 대령이 취임하여 4대 문교정책을 발표하였다.
이어 문교부는 1961년 9월 1일 법률 제 708호"교육에 관한 임시특별법(주요내용:사범대학은 가정과, 체육과, 사회생활과를 두고 기타학과는 폐지) 및 같은 해 12월9일 국공립대학 정비(단위 지역 내 국,공립 대학교가 설치되어 있는 경우에 그 대학교의 단과 대학과 동일 또는 유사한 독립된 국공립 대학이 해당 지역 내에 있을 때에는 그 대학은 폐지)와 학생정원의 정비(해당대학의 교육시설과 대학교 설치 기준령에 규정된 기준에 미달하는 경우,그 미달의 비율을 적용하여 학생정원의 감축)을 골자로하는 閣令 제283호"학교 정비 기준령"을 발표하였다.

이와 같은 박정희 군사정권의 급조된 억압적 교육정책으로 인해 부산대 사학과가 폐지되면서 김용기 교수 및 학생 8명이 본과로 이적하게 되었다.그리고 사학과 전체 정원이 40명으로 감축되면서 자연히 입학 정원은 10명으로 정리되었다.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본 학과는 초창기에 활약하던 몇 분 교수가 새로운 젊은 교수로 교체되는 변화를 맞이하였다. 1961년 노명식 교수가 문리과대 학장이 되면서 김익호 교수에 대신하여 학과주임을 겸직하여 5.16 후의 새로운 교육시책에 따른 학과의 재정비를 시도하였다. 선임 교수가 학과 주임을 계속 맡아오던 관례가 이로써 깨드려진 셈이나 얼마 후 학과주임을 다시 김익호 교수에게로 돌아갔다.
김성복 교수가 미국으로 유학 가고 노명식 교수가 학장이 되면서 서양사 연구실이 거의 공백이 되다시피 한 셈이 되었는데, 1962년 4월 김진경 교수가 새로 전강으로 부임하였다. 서양 고대사를 전공한 김진경 교수는 주로 셔양고대사와 중세사 강의를 담당하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군사정권의 교육정책에 의해서 1962년 부산대학교 사학과가 폐과되면서 교수와 학생이 경북대학교로 옮겨왔는데,교수로는 김용기 교수가 부임하여 한국사 강좌를 담당하였다.이 시기의 두드러진 현상은 學問활동의 활발성에 있다. 이는 쿠데타 이후 승진에 필요한 논문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타의적 요인도 적지 않게 작용하였으나, 이 무렵에 와서야 비로소 외국의 서적과 잡지가 정기적으로 들어오고, 교수 각자의 蘊蓄된 실력을 발휘할 수가 있었던 것에 기인한 바가 더 컸다.
김익호 교수는 「중국에 있어서의 근대화의 지체와 근대사의 구분 문제」(1961)를 발표하고, 노명식 교수와 공저로 『세계문화사』(1963) 교재를 편찬하였으며, 노명식 교수는 「현대 불란서의 사회구조」(1962)와 「불란서 제 3공화국의 정치 관견-제 3세력을 중심으로」(1967)를 「실학파의 사회개혁론」(1968)을 발표하여 조선조 후기의 정치 사회의 일면을 해명해 갔다. 김엽 교수는 초창기의 중국고대 노예제의 문제로부터 이 시기에 와서는 한대의 정치, 경제의 문제로 연구관심을 옮겨 「전한왕조의 農民 확보책」(1963),「한대의 孝悌 力田에 대하여」논문을 발표하였다.

김진경 교수는 희랍역사와 고전학에 관심을 가져 「Aristophanes와 Cleon」(1963),「Persia孝」(1967) 등을 발표하였고, 1968~1970年에는 미국 하바드 燕京學社의 비지팅 스콜라로 渡美유학 하였다.

이때의 학술활동으로 특기할 것은 학회의 결성과 잡지의 출간에 있어서 본 학과 교수들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는 점이다. 일찍이 1953年 본 학과 교수가 중심이 된 경북사학회가 조직되었고, 그것이 1965年에는 春秋學會로 발전하여 김익호 교수가 그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또 박영규 교수를 비롯한 국사교수로 조직된 한국사학연구회도 1968년에 생겨나서 그 해 「한국사학 연구」제 1집을 출간하였다. 그러다가 1969년 본 학과 교수들이 중심이 되어 기존의 학회들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새로이 대구 사학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그 정기간행의 기관지로서 「대구사학」제 1집(김익호 교수 회갑기념논문집)을 그 해 출간하였다. 이후 이 잡지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60여 호를 발간하여 지방의 역사관련 학회지로서는 최고의 부수를 자랑하고 있다.
학술활동으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전무후무하게도 제 4회 전국역사학대회를 1961년 10월21일-22일에 본교 사학과가 주관하여 개최한 일이었다. 이 대회는 전국 역사학자들이 모여 1년간의 연구 결과를 발표하고, 학문적 공동관심사를 토론하는 당시로서는 유일의 전국적 학술대회인 것이다. 여기에는 본 학과의 김익호,노명식,박영규 교수가 연구를 발표하였으며, 본 학과가 이를 주최함으로써 연구능력을 전국에 과시한 것이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40여 차례 전국역사학대회가 이어지고 있으나 지방에서 개최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밖에 본과의 활동으로 또 들 수 있는 것은 1960년 박물관과 합동으로 약목 고분을 발굴한 일이다. 이 발굴은 경북대학교로서는 물론이고 전국 대학 박물관의 발굴로서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1960년대에 말에 교수의 이동이 있었다. 노명식 교수가 1968년 경희대학교로 전출하고, 그 후임에 오랫동안 본과에 내강하였던 대구교육대학의 오주환 교수가 전강으로 부임하였다. 오주환 교수는 서양 근대와 현대사를 담당하였다.이 시점에서 김용기 교수가 부산대학교 사학과의 부활로 떠나고,다시 한 사람의 공백이 생긴 한국사의 자리에 서울대 사학과에 조교로 있던 한영국 교수가 전강으로 부임하여 주로 한국 근세사분야를 담당하였다. 일찍부터 박물관에 근무하던 윤용진 교수가 이에 앞서 전강으로 본 학과에 적을 옮겨 왔다.(1966) 그러나 고고학전공인 윤용진 교수는 사학과의 강의를 담당하지는 않았고 계속 박물관에서 연구를 수행하다가 1970년에는 다시 교양과정부로 옮겨 문화사를 담당하였다. 오주환 교수는 「Tawney 교수의 근대사회관」(1968)과 「미국사에 있어서의 고립주의와 국제주의」 (1969)등의 논문을 발표하여 구미근대사연구에 깊이 들어갔고, 윤용진 교수는 「인동 불로동 고령 고이동 고분발굴보고서」(1969)와 「금호강 유역의 선사유적 연구」 (1969)등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1971년 2월 김익호 교수가 정년으로 퇴직하였다.사학과 개설과 동시에 부임하여 20여년간 학과를 이끌어 오다가 퇴임하여 계명대학으로 옮겼다.또 박영규 교수는 숙환으로 1971년 이후 출강치 못하다가 1973년 타계하였다.이 시기에도 교수의 부족으로 인한 강의의 공백은 허진행,정만득 박송학,허진영 등의 강사들이 강의를 담당하였다.